home HOME > Theme > Interview

<Proper time>의 작가 이완
당신만의 속도
그대로, 괜찮다

글 김수영 사진 이완 제공

요즘 세상 변하는 속도를 가만히 가늠하다 보면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혼자 뒤처지는 게 아닐까 조바심도 난다. 그렇다면 얼마나 속도를 내야 적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전 세계 1,200명 삶의 속도를 공들여 취재하고 계산해서 수치화해낸 설치 작품<Proper time>의 작가는 말한다. 적정 속도란 없다고. 그러니 때론 멈춰 보라고.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고.

Proper time(고유시, 2017)_668개의 시계 벽면 설치 작품, 제 57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설치

1200개의 시계, 1200명의 삶

사각형의 방 안 벽마다 시계가 빼곡히 걸려 있다. 그런데 각각의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이 제각각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계마다 움직이는 속도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피커에서는 각자의 언어로 저마다의 사연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현대미술가 이완의 설치 작품 <Proper time>이다. Proper time, 고유시는 시간의 상대성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 나온 말이다. 운동 에너지와 중력에 따라 시간의 속도가 달라진다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따르면 어디에서 어떤 삶을 사는지에 따라 우리 각자의 시간은 조금씩 다른 속도로 흘러간다. 이완 작가의 작품 속 고유시가 보여주는 속도의 차이는 더 확연하다.
“이 작품은 아주 간단한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전 세계의 ‘개인’들은 한 끼 식사를 마련하기 위한 노동에 얼마만큼의 시간을 쓰고 있을까. 그 답을 얻기 위해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1200명을 인터뷰하고, 그들이 한 끼 밥벌이에 쓰는 시간을 토대로 계산한 각자의 고유시 속도에 맞춰 1200개의 시계를 제작했습니다. 나라와 직업에 따라 시계의 속도는 몇 배에서 수백 배까지 차이가 나죠.”
하지만 자본의 불균형을 보여주는 극명한 속도의 차이가 이 작품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전부는 아니다. 각각의 시계 주인이 자신의 삶을 들려주는 목소리들은 물리적 수치로는 설명되지 않는 인생의 의미를 담고 있다. 명쾌한 듯 미묘한 메시지를 담은 이 작품은 2017년 ‘미술 올림픽’이라고도 불리는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 전시되며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예술,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서다

설치 작품 <Proper time>에서 고유시를 산출하는 기준이 된 ‘밥 한 끼’는 이완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Made in> 시리즈에부터 이어져 온 중요한 화두다. 대형 마트에서 제품 성분 표기를 유심히 들여다본 작가는 문득 짧은 의문을 떠올렸다. 한 끼의 아침 식탁이 차려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나라 많은 사람의 노동력이 동원될까. 그 대답을 찾는 결코 짧지 않은 과정을 담은 작품이 <Made in>이다. 작가는 수년 동안 아시아 10개국을 돌아다니며 식재료부터 식기까지 한 끼의 아침 식탁을 차리는 데 필요한 재료 생산에 직접 참여한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했다.
“저의 작업은 사람들의 삶과 일상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여행을 다니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누군가의 기억이 담긴 흔적이나 의미 있는 물건을 수집해 옵니다. 2012년부터 준비하고 진행한 <Made in> 시리즈를 제작하면서는 아시아의 많은 나라를 방문하고 그들의 삶을 경험했죠. 그 과정에서 <Proper time>의 영감도 얻었습니다.”
물리학 법칙과 수학적 계산이 동원된 <Proper time> 작업 과정에서 작가의 마음에 가장 깊이 남은 것,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거대한 담론이나 구호가 아니다. 말레이시아에 사는 누군가와 그의 어린 나이에 죽은 동생이 가장 좋아했던 한 끼, 그래서 가장 슬픈 한 끼이기도 한 ‘어머니의 치킨 카레’ 같은 아주 사적인 이야기다.

우리는 누구나의 삶을 각자의 속도로 산다

속도에는 빠르고 느림이 있다. 하지만 개개인의 삶에는 비교될 수 없는 각자의 의미가 있다. 그러니 ‘Proper time’으로 가득 찬 방 안에 들어섰을 때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숨 가쁘게 빠른 속도로 혹은 숨 막히게 느린 속도로 흘러가는 시계의 움직임이 아닌, 시계 주인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아닐까.
“삶의 목적과 행복을 성공과 출세와 성과에 두고 살다 보면 상대적 박탈과 절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남보다 뒤처지는 인생은 아무 가치가 없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하죠. <Proper time>의 부제인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는 김수영 시인의 <봄밤>의 한 구절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너무나 멀리 있고 진전 없이 반복되는 듯이 느껴지더라도 당황하고 서둘지 말라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조언 같은 시죠.”
누구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떤 속도로 살아갈지, 얼마만큼의 행복으로 채워갈지는 각자의 몫이다. 우리는 다만 스스로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서로의 속도를 비교하기보다 존중하며, 가끔은 멈춰 서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볼 일이다.

이완(Wan Lee)
동국대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했다. 2014년 삼성 미술관 리움이 제정한 제1회 ‘아트스펙트럼 작가상’을 수상했으며, 제10회 광주비엔날레에 참여했다. 2015년 제26회 김세중 청년조각상을 수상했고,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대표작가로 선정됐다. 대표작으로는 <Made in> 시리즈, <Proper time>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