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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의 역사로 보는
‘필요’와 ‘소유’의 인문학

글 윤진아 참고 도서 <필요의 탄생>

최근 ‘콜드 체인’(저온유통 체계)이 전 세계적 이슈로 부상했다. 코로나19 백신 확보만큼이나 온전하게 유통하는 기술이 초미의 관심사가 됐기 때문이다. 인류의 생명을 좌우할 만큼 중요해진 콜드 체인 기술은 어디서 시작됐을까? 한때는 사치품에 불과했던 냉장고가 어떻게 필수품이 되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켰는지, 냉장고에 담긴 인류 욕망의 콜드 체인을 살펴본다.

MAKE HISTORY
인류 일상 송두리째 바꾼 냉장고

몇 해 전 한국에 상륙한 수제 맥주 열풍의 근간에는 ‘콜드 체인(Cold Chain)’이 있다. 빛과 열에 약한 맥주는 온도 유지가 생명인데, 미국의 수제 맥주사들이 콜드 체인 유통으로 맛의 변질을 최소화해 수출에 나선 것이다. ‘변형되지 않는 맥주 맛’이라는 마케팅은 취향을 타고 문화가 되어 전 세계를 강타했다. 짧게 보면 약 80년 전, 길게 봐도 150년 전에야 등장한 콜드 체인 덕분에 인류의 음식 소비 습관은 물론 식생활, 요리법 등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인류 전체 역사에서 볼 때 찰나에 불과한 시간 동안 냉장기술 때문에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식문화와 수요가 생겼다는 뜻이다.
2012년 영국왕립학회는 “식품학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명은 냉장기술”이라고 밝혔다. 냉장기술이 현대사회의 식량 공급, 식량 안보, 식품 안전에 필수라는 이유에서였다. 수천 년간 다양한 방식으로 음식을 보존해온 인류에게 냉장고의 발명은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사건에 속한다. 기실 냉장고가 보편화된 건 반세기밖에 되지 않았다. 식품을 오래 보관할 때 발효와 건조 방식이 더 선호됐고, 사람들이 얼음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냉장기술이 처음 등장한 건 19세기 유럽이었다. 얼음의 시원한 감촉과 신선한 식품의 맛을 알게 된 사람들은 온도를 낮출 수 있는 기술을 ‘필요’로 하게 됐다. 1920년대 전기 모터로 작동하는 냉매 압축기를 가정용 기기에 맞게 소형화하는 데 성공하면서 가정용 냉장고의 시대가 본격화했다.

CREATION
채우는 게 인지상정! ‘필요’를 창조하다

“새로운 가족이 당신의 삶을 화사하게 만들고, 주방 색을 아름답게 꾸밀 것입니다!”
1950년대 한 TV 광고에 등장한 문구다. ‘인류의 새로운 가족’을 자처한 주인공은 다름 아닌 냉장고였다. 이전까지만 해도 주방은 온갖 허드렛일을 소화하는 작업 공간이었다. ‘냉장고’라는 하얗고 세련된 가전제품이 주방을 깔끔하게 변신시키자 사람들은 다시 주방을 찾기 시작했고, 냉장고는 ‘사치의 상징’에서 ‘생활필수품’이 됐다. 20세기 냉장고 제조사들은 판매 촉진을 위해 ‘차가운 음식’ 제조법을 담은 요리책도 함께 배포했다. 냉장고가 사회의 주류 소비재가 됐다는 신호였다. 부유층의 사치품이었던 냉장고는 1960년대에 이르러 미국 가구의 97%가 보유한 전자제품이 됐다. ‘건강하고 안전한 음식 보관’과 ‘매끈한 디자인’을 강조한 냉장고 제조사들의 집념 어린 마케팅의 결과였다. 뿐만 아니다. 비좁았던 주방에 큼지막한 냉장고를 들일 수 있도록 주택 설계에도 혁신이 이어졌다.
지구촌 수억의 가정에서 냉장기술을 보유하게 되자 식품 유통 형태도 변화했다. 적정온도에서 보관하면 장기간 상하지 않는 가공식품들이 줄지어 등장했고, 육류도 필요한 만큼 도축하는 것이 아니라 도축한 만큼 수요로 밀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찌 보면 겨우 ‘냉기’ 하나 보관할 수 있게 된 것뿐인데, 그 차가움이 인류에 끼친 영향은 무척이나 강력했다.
냉장고와 콜드 체인은 식품 무역 시스템도 바꿨다. 저온유통이 활성화하면서 예전에는 비싸서 못 먹던 음식이나 제철에만 겨우 맛보던 음식을 계절과 지역에 상관없이 즐기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현지 생산자들은 시장가격 지배력을 크게 잃게 됐고, 반대로 머나먼 나라의 농부들은 타국에 진입할 새로운 시장이 생겼다.

FUTURE
미래를 욕망하게 하다

냉장기술 덕분에 인류는 식생활과 소비습관은 물론 주거 구조나 산업 전반에서 큰 변화를 겪었다. 냉장기술은 양조작업이나 플라스틱 생산, 의약품 개발, 백신 보관 등 비식품 산업에도 광범위하게 활용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D-웨이브 양자컴퓨터와 같은 최첨단 기기의 발열 현상 제어, 유럽입자물리연구소의 대형 강입자 충돌기 실험 등 첨단기술 분야에도 활용되고 있다. 극저온에서 세포조직 샘플을 냉동하거나 페니실린과 같은 주요 의약품 개발을 가능케 한 것도 냉장고다. 우주선, 댐 건설, 탄약 공장, 대규모 과학 실험 등에서도 냉장고의 힘은 막강하다.
인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냉장고는 이제 미래로 향한다. 인터넷이 연결된 스마트 냉장고, 환경 보호와 에너지 효율 제고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미래형 냉장고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조만간 한 수 위 냉장기술에 힘입어 영원히 보존할 수 있는 식량이 탄생할 수도 있고, 한발 더 나아가 인체를 급속도로 냉각해 냉동인간을 만들거나 의료적인 목적에도 쓰일 수 있을 것이다.
‘필요’에 의해 탄생한 냉장고와 냉장기술은 필연적으로 점차 발전할 수밖에 없다. 차가운 얼음, 신선한 음식, 쾌적한 주방에 대한 ‘필요’가 지난 반세기 동안 혁신적인 새 역사를 만들어온 것처럼, 앞으로도 또 다른 필요가 인류를 한 걸음 더 발전시키며 ‘쿨’한 미래를 열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