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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어른의
영웅
놀이

시그널 중독자
*필자의 요청으로 익명 게재

제가 요즘 <빈센조>라는 드라마를 열심히 보고 있어요. 이탈리아 마피아 보스의 양아들이자 마피아 조직의 콘실리에리라는 주인공 설정도 나름 재미있고 속도감 있는 전개도 좋지만, 저를 매료시키는 요소는 주인공의 영웅적인 능력치입니다. 부조리한 카르텔에 맞서 통쾌한 응징을 해대는 주인공의 모습이 멋져 보입니다. 이런 비현실적인 영웅 설정에 열광하는 것은 어쩌면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꿈에 대한 대리만족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릴 적 저의 꿈은 ‘Hero’였습니다. 만화영화 마징가 제트, 로봇 태권브이처럼 정의를 위해 불의한 악의 세력에 당당히 맞서 싸우는 Hero 말이죠. 한창 젊은 시절에 저는 영웅은 아니더라도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 데에 이바지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불혹을 훌쩍 넘긴 지금에서야 바라보는 저의 모습은, 그저 그런 소시민이랄까요. 조직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분란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가장 최고의 덕목이 되어버렸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고민보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생각으로, 힘을 가지신 분들이 만족할 만한 방향으로 무엇이든 결정하곤 합니다. 조직 속에서 제가 하는 일은 그저 모두가 “네”라고 할 때 “네”라 하고, 모두가 “아니오”할 때 “아니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행은 돌고 도는 것일까요? 미운 일곱 살 아들도 여전히 영웅 놀이에 심취해있더군요. 아들 방에 진열된 많은 로봇은 아들의 세계에서 모두 악의 무리에 맞서 싸우는 영웅입니다. 그런데 며칠 전 아들이 그림 하나를 내밀었어요. 그림 속에는 검은 양복을 입고 안경을 쓴 남자가 슈퍼맨 망토를 두르고 힘차게 하늘을 날고 있었어요.
“아빠, 이거 내가 아빠 그린 건데 잘 그렸죠?”라며 자랑스럽게 저를 바라보는 아들의 눈빛에서 깨달았습니다. 아들의 세계에서 저도 영웅의 반열에 서 있는 것을요. 이 일을 계기로 작은 결심을 하나 했습니다. 우리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영웅이 되기로 말입니다.
드라마에서는 부조리에 맞서는 영웅이 존재하지만, 현실에서는 내 일이 아니면 눈을 감습니다. 물론 수직적인 권력 구도로 촘촘히 짜인 조직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기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작게나마 용기 내는 연습을 시작하려 합니다. 눈을 질끈 감는 대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연습이요. 영웅도 분명 걸음마 시절이 있었을 거예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 거대한 부조리에 맞닥뜨리게 되더라도 드라마의 영웅처럼 용감하게 대응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 아들도 자라면서 저처럼 어릴 적 꿈과 현실 사이의 간격을 발견해 갈 테죠. 그 때 우리 아들에게 아빠는 좀 더 살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용기 내는 연습을 꾸준히 했던 사람이라 기억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