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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을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악의 평범성

글 민용준(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우리는 대중문화 속 ‘악당’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을까? 오늘날의 악당은 단순히 주인공에게 시련을 주는 평면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매력적이고, 때로 공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인물의 이면을 조명하여 악당에 대한 편견을 걷어낸 작품들을 살펴보자. 그리고 현실의 ‘악인’을 바라보는 시선 속의 고정관념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우리가 사랑한 악당들의
비하인드 스토리

영화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악인들로 가득한 고담시를 순식간에 장악해버린 악당 중의 악당이다. 그에게는 물리적인 욕망이 없다. 돈과 명예를 얻고 싶어서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그저 혼돈 그 자체를 즐긴다. 덕분에 잃을 것도 없다. 그래서 폭력과 살인을 저지르는 데 있어서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순수한 악의로 세상을 흔든다.
토드 필립스 감독이 연출한 <조커>의 주인공은 처음부터 악인이 아니다. 광대 분장을 하고 길거리에서 광고판을 들고 싸구려 뮤직 숍을 홍보하는 남자는 불량 청소년들에게 폭행을 당한다. 어수룩한 구석은 있지만 선량한 사람이었던 그의 광기를 잉태하는 건 부조리한 악의로 가득한 도시다. 그러니까 <조커>는 악마가 지옥을 만드는 이야기가 아니라 지옥에서 태어난 악마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사회적 약자로서 갖은 애환을 겪다 끝내 내면의 광기로 악인이 된 조커는 우리 사회에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잉태된 악의 근원을 고찰하고 논의하게 만든다.
영화 <말레피센트>는 동화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 등장하는 마녀 말레피센트의 숨겨진 이야기를 따라간다. 말레피센트는 사실 인간에게 배신당한 숲의 수호자였고, 그녀를 사악하게 만든 건 사랑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챙긴 왕이었다.
악당을 고찰하는 시선은 전통적인 동화 속 악당을 비틀어 세계관을 새롭게 해석하는 시도로 나아가기도 한다. 뮤지컬 <위키드>에 등장하는 초록 마녀 ‘엘파바’가 그렇다. 사실 엘파바는 불같은 성격 때문에 오해를 받고 있는 선한 인물이고, 하얀 마녀 ‘글린다’는 아름다운 외모로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는 허영덩어리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원작에서 파생된 작품과 서사를 통해서 우리는 기존에 알고 있는 이야기와 인물들의, 특히 악당들의 이면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영화 속 악당과
현실의 악인을 바라보는 시선

동화 속의 악인들은 늘 하나같이 권선징악을 위한 대상으로 존재했다. 선의 승리를 그리기 위한 단순한 장치에 불과했다. 하지만 실제 세계에서 악은 늘 패배하는 게 아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쓴 독일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악행은 끔찍한 악마들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가 대표적인 예인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이다. 현실에서의 악인들은 평범한 얼굴로 흉흉한 짓을 저지를 기회를 엿본다. 광장 벤치 아래의 폭탄 같은 존재다.
영화 <살인의 추억>의 소재가 된 화성 연쇄살인 사건은 30여 년 만에 진범을 검거하며 비로소 ‘추억’에서 해방됐다. 덕분에 <살인의 추억>을 봤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고 진술하는 진범을 통해 어떠한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악인의 실체를 알게 됐다. 스크린 너머의 악당을 구경하는 것과 현실의 악인을 맞닥뜨리는 건 완전히 다른 감각인 것이다. 특별한 인상으로 치장한 영화 속 악당들과 달리 평범한 얼굴로 다가오는 현실의 악인들은 보다 끔찍하고 가혹하게 마음을 흔든다.
<살인의 추억>의 엔딩에서 진범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목격한 소녀는 그가 ‘그냥 뻔하고 평범하게 생겼다’라고 말한다. N번방 사건이 세상에 드러났을 때, 많은 사람들은 대단한 악마를 상상했지만 막상 하나같이 평범한 인상의 진범을 보고 되레 허탈해졌다. 현실의 악인은 영화 속 악당처럼 쿨하거나 멋진 존재가 아니다. 안타까운 ‘비하인드 스토리’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명제는 그래서 중요하다. 현실은 영화가 아니다. 평범한 얼굴로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세계다. 소비할 수도 없고, 도취해서도 안 된다. 악인은 악인이고, 영화는 영화다. 배트맨도, 조커도 없다. 적어도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