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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먹고사니즘’
신비로운 직업사전

글 강문종(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조선잡사> 공저자)

“뭐 하면서 먹고 사니?” 다소 원시적인 질문이다. “무슨 일을 하고 연봉은 얼마나 되니?”라는 사회적 역할과 물질을 결합시킨 지극히 자본주의적이면서도 물신화에 빠진 질문도 있다. 노동의 현장에서 항상 제기되는 두 질문은 “직업이 뭐니?”로 집약된다. 결국 각자의 ‘사회적·경제적 지위’와 ‘정체성’은 ‘직(職)’과 ‘업(業)’으로 연결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점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으므로 전통시대를 이해할 때 당대의 직업은 매우 좋은 소재다. 조선 시대의 직업들을 통해 흥미로운 당시의 생활상 속으로 들어가 보자.

주례부터 스타일리스트까지
커버하는 조선판
웨딩플래너

먼저, 일하는 여성들을 만나보자. 가난한 사대부 여성들의 생존 수단이 되었던 삯바느질부터 자영업까지 다양했다. 그중에 흥미로운 여성의 직업이 바로 수모(首母)이다. 장파(粧婆) 혹은 머리어멈으로 불렸다.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미용과 의상 관련 전문가다. 특히 조선 시대 혼례에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웨딩플래너, 메이크업 아티스트, 스타일리스트 등의 역할을 모두 겸했다. 뿐만 아니라 신랑과 신부의 맞절과 합환주를 마시게 하고, 간단한 덕담을 해주는 등 주례사의 역할까지 그녀들의 몫이었다. 18세기 전후로 한양에서 약 40명 내외의 수모들이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며, 주로 왕실 혼례와 사대부가 등의 부유층 혼례를 주관했다.

‘범 내려온다~’
극한직업의
최고봉

사형 집행자인 회자수부터 소방수였던 금화군을 비롯, 과거에도 ‘기피 업종’에 종사했던 수많은 직업인들이 있었다. 이들 중에 목숨까지 걸어야 했던 직업이 있으니, 바로 호랑이 잡는 특수부대인 착호갑사다. 이들은 ‘호환’을 막는 역할을 하였으며 1416년 정부의 공식적인 임시조직으로 편성되었다. 1424년에는 40명, 1425년에는 80명, 1428년에는 90명 등으로 늘어나다가 세조 때에는 200명으로 급격하게 증가한다. 뿐만 아니라 『경국대전』에 이들의 수를 440명으로 명시하기도 했다. 주로 담력이 세고 무예가 출중한 이들이 선발되었다. 그들은 180보 밖에서 목궁을 한 발 이상 명중시켜야 하고, 두 손에 각각 30kg 정도의 물체를 들고 100보 이상 한 번에 이동할 정도는 되어야 했다. 목궁이나 쇠뇌로 저격한 후 창으로 급소를 찔러 사냥하는 것이 가장 대표적이었다.

‘사’짜는 안 붙어도
전문직 종사자!
조선의 과학수사대

전문직 종사자들 역시 주목된다. 입주 가정교사인 숙사에서부터 매사냥꾼 응사까지 다양하다. ‘사’짜는 없지만 주목할 만한 직업은 조선의 과학수사대 오작인이다. 이들은 시체를 다루는 검시관이었다. 검시는 최소 2회에 걸쳐 이루어졌고, 각각 서로 다른 검시관이 담당하여 객관성을 확보했다. 결과가 서로 다르거나 사인(死因)이 불분명할 경우 다른 지역의 오작인을 선정하여 재검하기도 했다. 흉기에 뿌려진 혈흔은 식초로 찾고, 상흔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데는 술지게미를 사용했다. 독사 여부는 은비녀를 항문이나 입에 넣어 판별하였고, 백지를 눈·코·입에 붙여 독기 여부를 판별하기도 했다. 단목탕으로 시신을 세척하고 삽주 뿌리를 태워 악취를 제거하기도 했다. ‘무원록(無冤錄)’은 이러한 검시의 방법 및 사례 등을 정리한 대표적인 법의학서다. 제목처럼 이들은 죽음의 원인을 밝혀 원망이 없게 했다.

명품 ‘가체’
디자이너

전문적인 기술을 필요로 했던 직업들도 있다. 조선 시대 여심을 흔들었던 가체장도 그중 하나다. 18세기 여성들의 대표적인 과시 소비의 대상 중 하나가 가체였는데, 풍성한 모발이 기본이고 한쪽으로 쏠려 기울어지거나 양쪽으로 묵직하게 내려오는 모양이 유행했다. 가체를 만들 땐 주로 죄수나 승려의 머리카락을 활용하기도 하고, 상투를 틀 때 자르는 머리를 활용하기도 했다. 탈색을 마친 머리카락을 검은색으로 염색하고 짧은 머리카락은 촛농을 써서 길게 붙였다. 수선한 머리카락을 곱게 빗어 머리타래를 만들고 광택 작업이 끝나면 가체는 완성된다. 가체는 수모가 직접 판매하거나 대여하기도 하였고, 체괄전이라는 상설 판매장도 있었다. 서울에서 11칸 반짜리 초가집의 6배에 해당하는 700냥 정도의 고가품이 거래되거나, 며느리가 시부모에게 인사하다가 가체의 무게에 목이 부러져 죽는 사건도 발생하는 등 여러 사회적 문제로 인해 정조는 가체를 금하는 법령을 반포하기도 했다.

입담으로 수익 창출!
오늘날의 배우 겸
유튜버

프로 바둑기사 기객부터 길거리 원숭이 공연가 농후자, 해금 연주자까지 예술이 상품화되면서 다양한 예능인들이 활약했다. 그중 하나가 전기수였다. 이들은 소설 낭독 전문가였다. 18세기 이후부터 소설은 매우 비싼 사치품이자 마치 현대의 드라마나 영화 같은 대중문화상품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소설이라는 문화상품에 돈을 아낌없이 썼다.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방각본 출판이 성행했고, 도서대여점 영업의 중심에도 소설이 있었다. 소설을 듣고 볼 수 있게 가공해 전달하는 전기수들은 주로 종로 일대 저잣거리에서 활동하였으며 사대부를 비롯한 부유층 여성들을 대상으로 방문 낭독 서비스도 제공했다. 낭독 솜씨와 표현력으로 청중들을 감동시켰던 이들은 공연 중에 서사의 전개가 매우 중요한 대목에서 입을 닫아 침묵한다. 이때 청중들은 앞 다투어 동전을 던지면서 계속 낭독해 줄 것을 주문하는데, 전기수는 돈이 어느 정도 쌓였다고 판단되면 계속 낭독을 진행했다. 이를 요전법이라고 했다.

과거시험
대리업자

저잣거리의 소매치기 표랑도부터 병역을 대신하였던 대립군 등 불법과 합법 사이를 오갔던 생계형 범죄자를 직업으로 인정하는 데는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어두운 시대상을 보여주는 과거시험 대리업자인 ‘거벽’을 둘러싼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다. 전통시대, 공직자를 공인된 시험으로 뽑았다는 것도 실은 매우 드문 일이다. 세계에서 중국, 한국, 베트남 정도가 그러했다. 신분제의 한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사다리가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17세기 이후부터 과거는 매우 불공정해지기 시작했다. 예상 답안지를 만들고 시험장으로 들어가는 행위를 ‘책행담’이라고 하였고, 몸싸움을 통해 좋은 자리를 잡는 ‘선접꾼’, 예쁜 글씨로 답지를 써 주는 ‘서수’ 등과 같이 거벽은 부정행위의 대표적 존재였다. 심지어는 영남지역 과거시험에서 1~3등의 답지를 한 사람의 거벽이 작성해 문제가 되었고, 이 일이 발각되자 자결하였던 유광억의 사례가 전해지기도 한다